몇일 전부터 오고가며
저녁 지는 빛이 너무 예뻐
벼루고 벼르다 쑥 용기를 냈다
저녁 핏빛을 담아내기 전
하늘에 앙증맞게 남은 흰손톱이
자기를 봐달라고 손짓을 한다
그렇게
붉은 하늘 빛 대신에
귀여운 흰 손톱을
냉큼 먼저 담기 시작했다
근 한시간 오랫만에
관광온 커플처럼
두리번 거리며
하늘도 다리도 나무도 물도
담아내다가 손도 잡아보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 시간을 십 몇분 처럼
흘쩍 날려보내며
문득문득 하늘에
여전히 남아있는
흰손톱이 생각날때마다
바라보며 주워담았다
한시간 후 담아 놓은
바구니를 들쳐보니
불과 한시간 차인데도
하늘 빛이 다르고
담아 둘때 홀로인지
친구와 같이 인지에 따라
어떤 친구와 함께
담아왔는지에 따라
흰손톱의 표정이
여러 모양을 띈다
멀리 홀로 있어
더 외롭고 쓸쓸해 보이기도 하고
멋진 돌기사랑 친구를 하니
후광아래 귀티를 풍기기도 한다
푸른 나무 사이로
삐죽 걸린 흰 손톱은
구해줘야 할 듯 하고
조금 더 검어진 하늘 아래
제법 무성한 나무의 키를
훌쩍 넘긴 손톱은 우쭐해 보인다
똑같은 하얀손톱인데
그리 긴시간이 흐른것도 아닌데
그리 다양한 꼴과 감정을 드러내는 건
아마도 작은 손톱 안에
그리 많은 사연을 꼭꼭 숨겨두었던 탓이리라
숨겨둔 사연이
어둠이 내리고
반가운 친구를 만나면
알게모르게 한숨에 실리고
떠드는 수다에 담기나보다
하늘에 뜬 하얀 손톱처럼
우리도 아닌듯 모르는 듯
우리 얼굴에 몸에
그리 사연을 담고 사나보다
우리는 사진을 찍는
내가 주인이라 생각한다
내가 찍을 것들과 풍경을 결정하고
타이밍을 정하고 구도를 잡고 내가 찍기 때문이다.
주인으로 사진을 찍을 풍경을 결정하면서
하나씩 배우는 것은 저기 있는
꽃, 풀, 나무, 해, 구름, 하늘 모두를 내가 찍는게
아니라 그들이 나를 부르고 나에게 마음을 열어 준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내가 주인일 수 없고
나는 그저 나에게 맘을 열어 말 걸어 오는
소리와 초청들에 그저 반응을 하는 하인일지도 모른다.
주인이 아니고 하인이라는 생각은
어떤 소리가 들리는지 어떤 초청에 응할지를
듣고 반응하는 일에 있어서도 영향을 미친다.
세심하지 못하고 초짜에 폼만 잡으며
주인입네 하는 이의 귀와 눈에는 멋지고 크고 찐한 것들만 담긴다.
하지만 멈춰서야 보이고
조용히 들어야 들린다는 것을 조금은 눈치챈
쪼금은 지혜로운 하인은 작은 것, 철지난 것, 모퉁이, 구석으로 가기 시작한다.
오늘도 아침 라이드 아빠 노릇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차를 세우고 또다른 멋진 초청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지난 한 해 동안 펜데믹이 준 작은 선물로 얻은 지혜의 덕이리라.
봄이 벌써 도망간지 오래
숨을 헐떡 거리며 마스크를 벗었는데도 땀을 비오듯 흘리게
만든 심술쟁이 햇님이 이글대는 한낮 땡볓의 시간에
여전히 봄이 남아있음을 보여주는 작은 왕자 공주님의 왕궁이
바쁜 걸음 운전사의 발목을 잡아 멈추게 했다.
한걸음을 옮기면 또다른 나라 왕자와 공주가
여기를 찍으면 또 다른 색깔 옷을 입고
이미 철지난 봄을 여전히 지켜보려고 소리를 내고 있다.
그래 어쩌면 봄 안에 여름도 겨울도 가을도 있고
무섭게 찌는 여름 안에도 겨울, 가을, 봄이 있음을
알고 사는 것 그것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지혜의 복이겠지.
한해 동안 수도 없이
소리를 듣고 열심히 풍경을 담았으면서도
이제야 겨우 주인의 음성이 들리는구나.
하지만 그게 어디냐. 그래서 고맙다.
물주기 집사의
게으른 돌봄에도 불구하고
생명의 힘은 자기 안에 있어서
싹도내고 꽃도 피운다
잘 생각해보면
우리는 얼마나 자랐나?
예쁜 꽃을 피웠나?
먹을 만큼 열매를 맺었나?
이런 관심에
우리의 눈길과 마음을 담아 살펴보지만
정작 새싹도, 꽃도, 열매도
그들에게는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닌
그저 덤덤히 생명으로 살아가는
일생의 걸음 걸음일 뿐.
사람들의 눈에는
눈부신 성공과
찐한 감동과 눈물나는 분투기가
눈에 띄고 관심이 되겠지만
정작 그걸 살아가는 이에게는
성공도 실패도 감동도 눈물도
모두 주어진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일상일 뿐
긴 시간을
돌아다 보며
기억이 일으키는
착각과 착시 그 사이 어디쯤
수없는 일상을 같이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음을
다시 떠올려본다
어떤 일은 당시로선
감당키 어려웠고
다시 돌아가도
특별히 다른 선택을 하긴 쉽지 않았을
수없는 선택과 실수와 착오들의 순간순간
그런 일상들이 그렇게 그렇게 싸여
지금의 나를 만들고
또 오늘 여기 또 다른 일상 앞에 서있다.
생명이기에 꾸역꾸역
그 일상을 맞이하고
지치고 힘들어도,
힘나고 보람차도
승리이던 실패이던
눈물이던 웃음이던
그 모든 것이
살아있기에 만나야 할 시간들이고
그 모든 것이
나요 너요 우리임을 깨닫기 까지
너무 오랜 시간을
돌고돌아 겨우겨우 다시 여기에 있다.
아무것도 없이
그냥 고맙고 예쁘고 귀하게 볼 순 없을까?
별것아닌 차이에 예민하고
그것하나 고쳐보려고 악을쓰며 소리지르고
조금 돌려 생각해 보면
길이 하나가 아닌데 그게 그렇게 보이지 않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아프게 돌려보내야만 했을까?
나이가 들어도
시간이 흘러도
정말 어려운 것.
생명을 생명 자체로 보는 일
내 앞의 소중한 것을 소중한 것으로 여기는 일
결과와 상황의
화려함과 환호에
가려진 생명의 아름다움을
두눈 꽉 부릎뜨고 지켜 보는 일.
그런 어려운 걸 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저녁에서 밤으로 넘어가는
붉은 빛 하늘이 너무 보고파서
길을 나섰는데 앗 너무 마음만 앞서
아직 밤도 아닌 오후의 끝에 다리에 와버렸다
오후던 저녁이던 밤이던
하늘은 하늘이지 하는 마음에
서둘러 하늘을 주섬주섬 담아 본다.
아직 저녁이 되기에도 이른 시간
서둘러 담아 놓은 하늘에는
낮동안 자랑스럽게 구름을 쫓아내고
푸른 빛을 간직한 그 하늘이 딱 서있다
하늘은 그냥 하늘이 아니고
친구인 구름을 싫다고 저멀리 쫓아내도
여전히 하늘 곁 어딘가에 남아있는
또 다른 친구들이 있다. 나무 건물 전신주
친구들과 함께 하늘을 담다 보니
스르르 하늘의 색이 저녁으로 밤으로 넘어가고 있다.
저녁으로 잠으로 넘어가는 하늘의 색은
붉다가 노래지고 다시 파래진다
밤의 파란 색은 낮의 파란색과는 달리 짙고 아프다
하루종일 당당함을 뽐내느라 참아야 했던
많은 속울음이 붉고 노란 빛을 지나
다시 파랑이 되었기에 그 파랑에는 슬픔이 담겼나보다
파랑이 다 같은 파랑이 아니듯
같은 곳에 있어도 다 같은 사람은 아니다
누구는 그저 밝음만으로 살 수 있지만
어떤이에게 밝음을 드러내는 일은
짙은 슬픔을 꾹꾹 참아내느라 어금니 꽉 깨물어
밤이 되면 슬픈 파랑이 되는 그런 삶일 수 있다.
우리 삶에서
낮의 파랑과 밤의 파랑을
구분해 낼 수 있다면
아주 조금은 넉넉한 어울림을 누릴 수 있겠지
만약 우리가
짙고 푸른 밤의 슬픔을
조금만 나눠질 수 있다면
우리 사는 세상은
아주 조금은 따뜻해 질 수 있겠지.
낮을 지나 저녁을 넘어
짙은 슬픈 하늘이 온다.
하늘을
하늘 되게 하는
가장 멋진 친구는
역시 구름입니다.
두터운 구름이
자신의 모양을
이리저리 바꾸면서
하늘을 가리기도 하고
때로는 하늘의 이불이
되어 넉넉하게 위로도 합니다.
구름은 또다른 친구들을
같이 불러 노는 놀이터가 됩니다.
구름이 만들어준 놀이터에는
뾰쪽 탑을 자랑하는 교회당도
멀리서 달려온 자동차들도
푸른 빛으로 여름을 알리는 나무들도
다같이 어울려 손잡고 뛰놉니다.
그렇게 구름아래 모여
뛰노는 친구들 위로
작은 햇빛까지 찾아오면
또 순식간에 하늘은 미소를 띕니다.
하늘의 미소에 답하고
몰려온 친구들을 환영하며
다시 구름은 손과 팔을 활짝 벌려
이전과는 또다른 풍경을 만들어 냅니다.
그렇게 구름, 교회, 나무, 빛이
하늘과 손잡은 자리에 어울림이 있습니다.
어울림은 누구 하나 힘센 지도자가 만드는
무슨 운동이나 캠페인이 아닙니다.
어울림은 그냥 있는 그 모습대로
자기들 있는 자리에서 서로를 환영하고
서로의 다름을 받아들이고
자기 자리를 지키며 서있는
자연스러움 바로 그것입니다.
오랫만에
그림 공부를 했다
오늘 공부 주제는
"제한된 색으로 그림 완성하기"
주어진 물감은
노랑과 보라 그리고 흰색
보색을 사용하여
가능한 한 다양한 색을 만들어
림을 완성해 보는 것이 미션이다.
공식적인 미션과 상관없이
(늘 가르치는 이의 목적과
실제 수업 사이에 그리고
학생의 실력과 깨달음 사이에는
엄청난 갭이 존재하기에)
오늘 내가 얻은 가장 큰 소득 중 하나는
아! 그림은
사진과 다르구나
하는 것이었다.
애정하는
그림공부 메이트님은
이 깨달음을
자신의 음악교육에서
배운말로
"모든 이는 자기 해석을 한다" 로
번역하여 설명을
제법 몇번이나 반복하였는데
나는 오늘에서야
그림을 통해 깨달았다.
색이 제한되었기에
눈에 보이는
실제 대상(사진에 담긴)을
그대로 표현할 색이
나에겐 없다
하지만 나는 그걸 보고
내 그림을 그린다
처음에는 그저 색만
다르다 생각했는데
사물이
있는 자리도
모양도 다르다
거기 서있는
사물이 내 눈과
사진을 거치면
거의 있는 모습
그대로 담겨 오지만
거기 있는
핏쳐와 망고가
내 눈과 손을 건너면
낮선 곳 다른 색으로
자리를 올겨버린다
어느것은
핏쳐이고 망고지만
다른 것은
망고이고 핏쳐가 아닌가?
이건 맞고 저건 틀렸나?
아니 그건
모두 맞고
이건 사진기가
본 그들이고
저건 내 몸이
바라본 이들이다
이것도 저것도
다 망고이고 핏처고
저것도 이것도
핏처고 망고다.
그걸 알게 되니
붓에 조금은
힘이 들어가고
색을 칠하는 일에
제법 용기가 생긴다
누군가는 이걸 보며
혹평을 한다고 해도
이젠 배를 쑥 내밀며
"이건 내가 본 망고와 핏쳐야"
말하면 그뿐이다
내가 사는 삶도
마찬가지이다
"이건 내가 본 내 세상이야"
당당하게 외치며
나는 내 해석으로
내 삶을 산다.
다만 모든 것에는
최선이 담겨야 하고
그렇지 않은 것을
그렇다고 우기는 일은
그리 오래지 않아
모든이에게 들통이
난다는 것만 기억하자
그림은
참 많은 것을 알려준다
밤은
분위기와
풍경만이 아니라
모든 밤에 거하는
친구들도 바꾼다
낮의 모양을
결정하는 주인공이
높이 솟아 따갑게
비취는 해의 기운이라면
밤의 친구들을
마술로 초대하는
대연회의 주인장은
단연 땅에서 불쑥 솟은
은은한 불빛 불빛 불빛이다.
낮의 색과 모양은
자기를 자랑하고
숨김없이 다 드러내는
당당한 용사의 그것이라면
밤의 빛과 자태는
무언가 감추고
은은하게 유혹하는
수줍은 신부의 모습을 띈다
하늘의 강렬한 태양빛이
오히려 낮에 초대된 손님을
오롯이 무장해제 시킨다면
밤의 쓸쓸한 불빛은
저녁 잔치에 설레임을
배가시키며 얼굴을 가리게 만든다
밤의 수줍은 불빛 아래
교회도 다리도 나무와 하늘 조차도
빌딩을 덮고 공격하는 덩쿨 병사들도
마치 들켜서는 안되는 매복병들처럼
자기 모습을 위장하고 거기 서있다
우리가 꾸역꾸역 살아가는 삶에
성공과 승리와 자랑과 축배만 있지 않고
실패와 패배와 겸손과 굴종도 있음이
밤과 낮의 풍경안에서도 고스란이
담겨있음에 다시 깊이 고개를 끄덕인다
대부분 우리는
밝음과 당당함을 원하지만
그렇지 않은 씁쓸함에도
맛이 있고 색이 있음을 안다면
우리의 한숨이 조금은 가벼울 수 있을까?
짙은 어둠이 덮여가는
강가의 수줍음을 담은
가로등을 바라보며 다시 나를 본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림을 그렸다
떨리는 마음과
뭉툭한 손으로
좋은 선생님은
학생이 알아듣고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야 한다
좋은 선생님은
학생이 어찌 해야할지
이해할 수 있게
설명 할 수 있어야 한다
좋은 선생님은
학생이 어디쯤 가고 있는지
무엇이 왜 엇갈렸는지를
알고 다시 고쳐줄 수 있어야 한다
미술과 체육은
몽둥이와 숙제로는
절대 배울 수 없다
몽둥이와 숙제를 앞세운
미술 체육 시간에
웃을 수 있었던 애들은
배워서가 아니라
이미 배울 필요가 없는
아이들 이거나
좋은 부모의 자식임에 틀림없다.
나는 오늘
태어나 처음으로
공 상자 원통을 그렸다
좋은 선생님은
설명하고 칭찬하고 고쳐준다
좋은 선생님의 숙제는
성적과 보상과 상관없이
가슴 설레게 하고
종이와 연필을 사게 만든다
나는 오늘
평생 처음
좋은 미술 선생님 덕분에
원통 상자 공을 그렸다
"2014년 4월에 그림을 배우며 씀"
나를 향한 사랑이 눈물나게 고마운 때가 있었습니다.
허다한 죄와 모든 연약함을 덮고 움추린 어깨를 다시 펼수 있을 만큼의 격려
끝없는 지지와 칭찬이 근거없는 자신감을 주어 천지 사방 모르게 달려가게 했던
그런 은혜와 작은 손길들이 고마와
나도 누군가에게 작은 비빌 언덕이 하나의 작은 디딤돌이 되어보자 결심을 했습니다.
작은 양보, 한 번 더 참는 너그러운 마음, 상대방의 입장 되어보기
결과보다는 사람을 먼저 생각하기, 정답 보다는 형편과 처지를 돌아보기
작아 보이지만 이런 것들을 살아내는 일에도
만만치 않은 부딪힘이 생깁니다.
“그래도 틀린 것은 틀린 거지요” “참기만 하면 결국 다 뺏깁니다"
“저 사람은 항상 그래요, 변하지 않아요" “결국 정답이 없다는 건가요?”
이런 저런 소리에 주춤주춤, 우물쭈물
소심한 마음이 손과 발을 움츠려 들게 만듭니다.
그러나 더더욱 곤란한 것은
바깥에서 오는 바람이 아니지요.
내 속에 고이고이 숨겨 놓았던
딱딱하고 굳은 마음들, 한 없이 게으른 손과 발,
화장 뒤에 숨어있는 자신없는 민낮, 자책들이 마구마구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이길 수 있을까요?
우리의 기도가 또 하나의 강력한 무기와 능력이 아니라
처음처럼 작은 것에 감사하는 소박한 마음이 되지 않으면
소박한 감사가 온갖 소란한 정답의 능력을 이기지 않으면
무더운 여름을 지나고 맞은 높은 가을 하늘의 맑음을 따라
그렇게 작지만 야무진 기도의 손을 모으고 무릎을 꿇어
아 그래 사랑이 이기는구나! 를 같이 외치는 그런 가을이 되기를
어떤 바람과 소리와 들끓는 파도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셨던 그 분을 따르는 작은 공동체가 되기를
우리에게 기도가 그런 실마리가 되기를
여기는 별천지네
코로나 해방구. 복장은 같아도
수없이 많은 이들이 어깨를 부딪히고
닭강정과 오징어순대 씨앗 호떡 꼬마 김밥을 찾는다.
조금 여유있고 나이든 분들은
반 건조 오징어와 건어물 대게와 횟집을 가득 매운다.
그 사이로 각종 젓갈이 쑥 눈에 들어와서
오징어,창란,명란 젓을 살피는데
갑자기 ‘가자미 식혜’가 긴 시간의 추억과 함께 달려온다.
아버지는 남도 분이셨는데
어찌어찌 북쪽 분들 친구분들이 제법 있으셨다.
엄마의 기억과 아빠의 기억이 서로 달라
어디서부터 어느 친구때문인지가 자주 달라지지만
옛 기억속 우리 집에선 ‘식혜’를 자주 먹었다.
왜 이게 식혜야?
식혜는 밥먹고 마시는 거 아니야? 를 늘 물으며
생기기도 이상하고 맛도 특이한 식혜를 먹었다.
그렇게 50년을 소환한
‘가자미 식혜’ 를 냉큼 담아달라 말하고
흥분된 마음으로 아빠 엄마에게 기억소환의 선물을 드린다.
상 모퉁이 게장과 함께 수줍게 놓인
그놈 덕분에 말없어지신 우리 아버지
오래 먼저 떠나신 스승의 이름과 친구들의 이름을 부르시며
맛나게 먹으시는 모습에 ‘아 잘했다!’ 마음 한켠 뿌듯함이 올라온다.
그렇지 음식은 그저 맛으로 먹는게 아니지
음식에는 사람이 있고 추억이 있고 사랑과 환대가 있었지.
문득 지난 60여년 우리 엄마가 만들어 내었던
오뎅 넣은 김치찌게 한솥 끓여 같이 먹던 사람들과
주일 아침마다 같이했던 아침밥상을 기억하는 흘러간 이들의
얼굴과 이름 그리고 고마움과 감사들이 필름처럼 지나간다.
우리는 그렇게 한솥에 밥을 먹으며 주의 몸과 피를 나누었고
머리로 말로가 아닌 온몸으로 신앙과 사는 법을 익혔다.
밥이 삶이고 그게 신앙의 도리인 것을…
말이 좋아 따랐던 이들과
멋지고 신나는 일들과 분위기에 휩싸여 열광했던 이들은
지금 다들 흩어져 어디있는지 조차 알 수 없지만
오랜 시간을 돌아 연락이 닿은 이들의 첫 말이
“어머님이 그때 해주셨던 밥이 생각나. 어머님 잘 계시지?” 인걸 보면
우리 모두를 키우고 엮었던 것은 밥심인게 분명하다.
엄청 빠른 변화를 말하고
교회의 쇠퇴를 말하며
무언가 또다른 대책마련이 시급함을
이야기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나도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보다가
다시 상 모퉁이 ‘가재미 식혜’를 보며
‘밥심이 최고여’ ‘밥이 사람을 키운다’를 생각해 본다.
어쩌면 우리는 잘해보려다가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사는 건 아닐까?
2021년 20여년 만에 찾은 고국땅에서
보스턴 디딤돌 교회 Stepstone Church of Bos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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